2026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국어 영역의 고난도 문항으로 꼽히는 17번 문제가 논란의 중심에 섰습니다. 바로 독일의 대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인격 동일성’에 관한 지문을 다룬 문제였는데요. 한 포스텍 철학과 교수가 한국교육과정평가원(평가원)이 제시한 정답(3번)에 논리적 오류가 있다며 ‘정답 없음’을 주장하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이 논란은 단순히 수능 한 문항의 정오를 넘어, 지문에 담긴 칸트 철학의 핵심 개념과 논리적 추론의 엄밀성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이 글에서는 수능 지문의 철학적 배경을 쉽게 풀이하고, 교수가 제기한 ‘단일한 주관’과 ‘생각하는 나’ 사이의 연결 고리에 대한 논리적 틈새를 전문가의 시각으로 단계별로 해부해 보겠습니다. 궁극적으로 이 문제의 쟁점과 이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통찰을 안내합니다.
수능 문항을 통해 본 칸트 철학의 배경
인간의 정체성, 즉 ‘나는 어제와 오늘의 나와 동일한 존재인가?’라는 질문은 고대부터 철학의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였습니다. 칸트 이전까지 이 ‘인격의 동일성’을 설명하는 가장 유력했던 견해는 무엇이었을까요?
칸트 이전, 영혼의 지속으로 인격을 설명하다
칸트 이전의 유력한 견해는, 지문에도 언급되었듯이, 바로 생각하는 나인 영혼이 ‘단일한 주관’으로서 시간의 흐름 속에 지속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쉽게 말해, 우리의 육체가 변하고 기억이 희미해져도, 그 모든 것을 겪고 생각하는 ‘영혼’이라는 변치 않는 실체가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동일한 인격이라는 설명입니다. 이는 우리의 정체성을 초월적인 어떤 것에 기대어 설명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지문 속 ‘갑’의 주장: 의식 복제의 딜레마
수능 17번 문항 속의 ‘갑’은 바로 이 전통적인 견해에 반박합니다. 갑은 두뇌의 의식을 스캔해 프로그램으로 재현한 경우를 가정합니다. 이 복제된 의식이 원본과 동일한 기억과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갑은 본래의 자신과 재현된 의식은 동일한 인격이 아니다라고 주장합니다. 이는 단순한 ‘생각하는 나의 지속’만으로는 인격의 동일성을 보장할 수 없다는 칸트적 사유의 반영입니다.
지문에서 칸트가 인격의 동일성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단일한 주관’ 외에 경험 내용을 통합하는 능력을 제시했음을 고려할 때, 복제된 의식은 물리적이고 시간적인 ‘단일한 주관’이라는 조건을 충족하기 어렵습니다. 복제된 것은 원본과 별개의 존재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포스텍 교수의 ‘정답 없음’ 주장, 논리적 틈새는 무엇인가
논란의 핵심은 평가원이 정답으로 제시한 3번 선지입니다. “칸트 이전까지 유력했던 견해에 의하면 생각하는 나의 지속만으로는 인격의 동일성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갑의 입장은 옳지 않겠군”이 그것입니다.
정답 선지(3번)의 역설적 구조 파악하기
3번 선지는 ‘칸트 이전 유력 견해’의 입장에서 ‘갑의 주장’을 판단하는 구조를 가집니다.
칸트 이전 유력 견해: 영혼이 ‘단일한 주관’으로 지속하면 동일 인격.
갑의 주장: 의식 복제 상황에서 ‘생각하는 나의 지속만으로는’ 동일 인격이 아니다 (즉, 다른 조건이 필요하다).
3번 선지의 결론: 칸트 이전 견해에 따르면, 갑의 입장은 옳지 않다.
즉, 칸트 이전 견해는 ‘영혼의 지속 = 인격 동일성 보장’이라고 보았으므로, 갑이 ‘생각하는 나의 지속만으로는 보장 안 된다’고 주장하면, 당연히 칸트 이전 견해는 “무슨 소리냐! 영혼만 지속하면 보장된다”며 갑의 입장을 부정할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보면 3번은 칸트 이전 견해의 입장을 정확히 반영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철학과 교수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단일한 주관’과 ‘생각하는 나’ 사이의 연결 고리 검증
포스텍 이충형 교수의 주장은 이 논리적 연결 고리의 엄밀성, 즉 전제와 결론의 대전제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조건 불충족이 논리를 뒤집다
교수는 갑의 주장이 ‘의식이 스캔 프로그램으로 재현된 경우’라는 특정 상황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이 상황은 복제된 의식이 원본과 단일한 주관이라는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칸트 이전 견해의 전제: 인격 동일성은 ‘단일한 주관’인 영혼의 지속으로 성립한다.
교수의 분석: 복제된 의식은 ‘단일한 주관’이 아닙니다. 이 경우, 칸트 이전 견해의 핵심 전제가 무너집니다.
지문의 표현에 숨겨진 논리적 맹점
교수의 핵심 비판은 지문 속 표현의 해석에 집중됩니다. 지문에는 ‘칸트 이전까지 인격의 동일성을 설명하는 유력한 견해는 생각하는 나인 영혼이 단일한 주관으로서 시간의 흐름 속에 지속한다는 것이었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교수는 ‘갑은 생각하는 나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영혼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다’며, 지문이 ‘생각하는 나’와 ‘영혼’을 동일시하고 있음을 전제로 하지만, 갑의 주장에서 이 둘의 연결 고리가 끊어져 있음을 지적합니다. 복제 상황에서는 영혼이 없는 ‘생각하는 나’의 재현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교수는, 갑의 주장이 복제 상황(단일한 주관 불충족)을 전제로 하므로 ‘생각하는 나의 지속만으로는 보장하지 않는다’는 입장은 칸트 이전 견해에 의해서도 틀린 말이 아닐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칸트 이전 견해 역시 ‘단일한 주관’을 요구하는데, 복제는 이 단일성을 깨뜨리기 때문입니다.
이 논란이 주는 철학 및 논리학적 교훈
수능 국어 17번 문항 논란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중요한 교훈을 남깁니다.
논리적 엄밀성: 단순한 독해가 아닌 추론의 문제
이 문제는 단순한 지문 독해를 넘어, 철학적 개념을 논리학의 대입 및 검증 과정으로 풀어내야 하는 고차원적인 사고를 요구합니다. A가 B이면, C는 D라는 식의 단순한 논증 규칙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전제와 결론 사이의 숨겨진 가정(단일한 주관의 지속)까지 파악해야만 오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개념의 경계 설정과 학문 간의 융합
철학적 개념인 ‘인격 동일성’이 ‘수능’이라는 시험 무대에서 ‘논리학’의 잣대로 평가받는 상황 자체가 흥미롭습니다. 이 논란은 개념의 정의(예: 생각하는 나 vs. 영혼)가 조금이라도 모호할 경우, 논리적 추론 과정 전체가 흔들릴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어떤 개념을 이해하고 설명할 때, 그 개념의 경계를 얼마나 명확하게 설정해야 하는지를 다시금 되새기게 합니다.
평가원의 최종 결정을 기다리며
현재 평가원은 이 문항에 대한 이의 신청을 접수하고 최종 정답을 검토 중이며, 오는 25일 최종 결과를 발표할 예정입니다. 이 사태는 수능 국어 영역이 단순 언어 능력을 넘어, 인문학적 소양과 논리적 사고력을 극한으로 시험하는 장이 되었음을 입증합니다. 어떤 결론이 나든, 이 논란은 수험생과 교육계 모두에게 논리적 사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역사적인 사례로 남을 것입니다.